부자로 사는 것은 영생을 댓가로 지불하고 재산을 향유하는 것
부자로 사는 것의 위험성은 영생을 댓가로 지불하고 재산을 선택할 위험성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살길 원할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자신의 가난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비참한 삶을 살지 않기로 결단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가난을 겪어본 사람,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은 가난한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되세요’라고 인사하기를 시작했다. 부자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댓가가 있다면 부자로 사는 것의 댓가는 무엇일까?
▲이상권변호사


성경은 부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성경은 부에 대해 훨씬 적대적이다. 특히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인 ‘누가복음’에는 부자로 사는 것은 화가 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의 팔복에 대응하는 누가복음의 4복4화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화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청부론’을 주장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부’에 대해서 말해주는 중요한 사건은 예수가 한 부자청년을 만난 에피소드이다. 예수가 세상에 있을 때,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예수에게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물었다. 예수는 그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반문했다. 부자청년은 십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네게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줘라.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다.

부자청년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를 따랐을까? 성경은 그 청년이 어떻게 했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은 예수의 말을 듣고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 그는 ‘영생’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다 댓가로 지불하고 영생을 얻기는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을 댓가로 지불하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댓가로 지불하고 재물을 얻는 것을 선택했다.

성경은 부자청년이 그런 선택을 한 원인을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NIV 버전 영어성경:‘because he had great wealth’)라고 기록했다. 그 청년이 재산이 적었다면, 혹은 재산이 없었다면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를 소유했지만 부도 역시 그를 소유했다. 그가 소유한 부는 그의 선택에 결정권을 행사했다. 부자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재산을 포기할 수 없어, 근심하며 예수를 떠나갔다.

예수는 근심하며 떠나가는 부자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예수는 부자청년을 보며, 부자로 사는 것의 댓가와 위험성을 간파했다. 부자로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댓가로 지불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부자로 사는 위험성은 부유함으로 인해 영생을 얻을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예수와 부자청년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부자로 사는 것에는 댓가가 있음을 알려준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른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부자청년의 선택은 영원한 생명을 댓가로 지불하고, 재산을 선택한 것이다. 이 세상을 부자로 사는 것도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사는 것이다.

부자로 사는 것의 위험성은 영원한 생명을 댓가로 지불하고 재산을 선택할 위험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만이 존재하고, 죽음 이후에 다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선택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하고, 영원한 생명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눈깜짝할 사이보다 더 적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영생이 존재한다면, 부자로 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위험은 영생을 댓가로 지불하고 부유함이 주는 자유와 평안과 안일함을 누릴 위험이며, 우리가 소유한 부가 크면 클수록 그 위험은 더 크다.

부자청년 에피소드는 이 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약에 의하면 부자는 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누가 영생을 얻겠는가 반문한 것이다. 예수는 이에 대해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하셨다. 부자는 지옥에 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며, 정말 영생의 가치를 알게 되면, 부자청년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이 세상을 부자로 산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댓가가 있으며 위험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을 가난하게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풍부에 처하든지, 빈천에 처하든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만족하며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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