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희망/지상강좌] 조관일 조관일창의경영연구소 대표

농협 입사, 임원(상무)으로 농협중앙회 퇴사, 강원도 정무부지사와 대한석탄공사 사장 역임, 퇴직 후자신의 이름을 내건 연구소 설립, 유명 강사, 48권의 책발간….

화려한 그의 이력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이 사람, 금수저가 아닐까’ 싶었다. 진실은 뜻밖에도 반전을 선사한다. 5월 24일 청년희망재단 연단에 선 조관일(67) 조관일창의경영연구소 대표는 강연에 참석한 청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늘 주제가 ‘자기 세상을 만들 용기’예요. 사실 저는 학력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다녔던 춘천농과대학(농학과)은 강원도에 위치한 작은 학교였어요. 우리 집에는 논도 밭도 없었는데, 이런 제가 농대를 갔으니 말 다한 거죠. 대학 3학년 때까지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니까요(웃음). 나중에 교명이 강원대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저는 지방대 출신이에요. 사람마다 능력과 한계가 달라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조관일 조관일창의경영연구소 대표는 청년들에게 “지금의 노력이 당장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하면 훗날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사진=청년희망재단)

계속된 취업 실패 후 방향 전환
산에 들어가 1년간 연설 연습

그가 꿈을 이루고자 몸부림치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난 후였다. 1971년, 당시 ‘40대 기수론’을 이끌었던고(故)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 사람이 춘천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는데, 그 자리에서 연설을 접한 뒤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말 몇 마디로 2만여 명의 군중을 한순간 집중하게 만드는데 정말 멋지더군요. 당시 저는 취업에 계속 실패했던 터라 상심이 매우 컸어요. 어차피 지금 취업이 안 된다면 좋아하는 걸로 다시 도전해보자고 결심했죠. 그 길로 산에 들어가 1년간 유명 인사의 연설을 흉내 내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때부터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어요. 독서를 통해 얻은 아이디어와 감상은 틈틈이 메모했고요.”

당시 그가 구상한 아이디어 중에는 꽤 흥미로운 아이템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악보를 넣으면 자동으로 연주하는 장난감 악기다. 조화(造花)에 특수물질을 투입해 습도와 온도에 반응하게끔 한 것도 이때 구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제품으로 탄생하지는 못했다. 1년 동안 연설을 연습한 것이나 아이디어를 발휘하는 훈련을 한 것도 당시 그가 취업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눈에 띄는 스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우직하게 연설을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농협에 입사했다. 하지만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가 강원도민이라는 이유로 춘천지점으로 발령 받았기 때문이다. 입사 동기 81명 중 조 대표만 지방대 출신이었다. ‘결국 강원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서러웠지만 ‘훗날 서울로 입성하리라’ 다짐했다. 그런 그가 첫 출근 후 주목한 것은 고객을 대응하는 법이었다.

“당시 농협을 방문하는 고객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스타일이 다소 투박하고 거친 탓에 창구 직원들이 응대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더군요. 고객들은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며 불만을 토로하고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때 목표를 설정했어요. ‘춘천에서 최고의 서비스 전문가가 되자’. 이후 농민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대출 서비스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어요. 그랬더니 실적이 점점 좋아지더군요.”

지금의 노력이 당장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훗날 내 인생 좌우할 모멘텀 될 수 있어

조 대표의 이런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선배였다. 선배는 조 대표에게 친절 서비스에 관한 책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마침 고객을 응대하면서 노하우가 꽤쌓였던 참이었다. 바로 집필에 착수해 첫 번째 저서 <손님 좀 잘 모십시다>를 펴냈다. 책 발간한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농협중앙회에서 연락이 왔다. 회장과 임원 대상으로 친절 서비스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만세”를 외쳤다. 1년간 산에서 연설을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것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쌓았던 연설 실력과 아이디어 덕분에 저는 전국 농협 직원 6만여 명 중 서열 3위인 농협중앙회 상무에 올라 계급정년을 맞고 퇴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노력이 당장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어요. 훗날 내 인생을 좌우할 모멘텀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평소에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조 대표는 삶을 사는 데는 ‘꾸준함’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는 은퇴를 앞뒀을지라도, 다른 조직에서는 신규 직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도 끝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조 대표가 농협에서 퇴직한 지 나흘이 지났을 때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강원도 정무부지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조 대표는 곧장 짐을 쌌다.

그곳에서도 그의 아이디어는 발휘됐다. 조 대표는 청년창업지원센터를 설립할 때 도의 청년창업지원과와 통합하자고 제안했다. 사회 경험이 적은 청년들이 청년창업 담당부서 담당자와 통화하는 데 두 번씩이나 전화가 돌아간다면 더이상 문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일부 청년창업가들은 복잡한 행정 절차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허투루 여기는 공무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제가 이런 의견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청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했기 때문이에요. 40년 전 소나무와 돌하루방을 청중으로 삼고 연설을 연습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때 제가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끊임없이 시도하세요.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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