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50주년…땀과 열정으로 꽃피운 ‘과학입국’

1966년 2월 10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출범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하 KIST)이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과학기술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온 KIST는 설립 이후 국가 주요 연구사업을 수행해 약 600조 원의 경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논문 및 특허를 비롯해 연구개발 사업화, 정책적 파급 효과 등을 종합한 수치다. 그동안 KIST가 연구개발 사업화를 통해 산업체 매출에 크게 기여한 10대 기술에는 가변용량 다이오드를 이용한 휴대용 TV 수상기, 푸시버튼 전화기, 염료 합성기술, 컬러TV 수상기, 고강도 아라미드섬유 기술, 캡슐형 내시경 미로, 치매 치료제 기술 등이 있다.

현재 KIST는 창조경제 실현에 앞장서며 창조경제 지원형 상용화 연구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혁신연구에도 매진해 양자 고유 현상을 이용한 신개념 초고속 컴퓨터 기술인 ‘양자 컴퓨터’, 뇌 신경망 정보처리 과정 모사로 사물에 지능을 부여하는 ‘나노 신경망 모사’ 등 포스트 디지털 시대 대비를 위한 원천기술 확보에도 주력하고 있다.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서울 성북구 본원 전경.

1960년대 산업화 시기, 과학기술의 중요성 부각
박정희 대통령 한·미 협상 성과로 지원받아 KIST 설립

“한국의 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 (1965년 5월 한·미 공동성명 중)

1966년 2월 10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 정부가 설립한 KIST는 5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은 이제 개발도상국의 발전 모델이 되고 있다.

KIST가 설립된 데는 당시 과학기술에 대한 시대적 열망이 배경에 깔려 있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제조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고, 내수와 함께 수출도 늘어 수출상품의 다변화와 품질 개선, 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이 막 부각되고 있었다.

반면 공업 인프라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상황으로 1960년대 업계에서 공업 관련 연구소 설립 제안이 처음 제기됐다. 정부는 공업 발전과 관련한 사업 추진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기술 진흥계획도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수립했다. 1964년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인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재정 확보가 어려워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5월 미국 공식 방문에서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KIST 설립도 탄력을 받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보답의 성격으로 미국의 초청을 받았는데 이때 정상회담에서 한국 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희망의 뜻을 내비쳤고, 미국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따라 1966년 2월 2일 박 대통령은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하고 이튿날 초대 소장으로 최형섭 박사를 임명했다. 이후 연구소 설립·운영에 관한 ‘한·미 공동지원사업계획 협정서’에 조인하면서 2월 10일 마침내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가 탄생했다.

당장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KIST 설립 목적이었기 때문에 연구소는 설립 초기 곧바로 산업계 현안부터 조사하고 연구했다. 조사연구가 전체 연구의 22.2%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산업 기초조사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대표적으로 1967년 ‘과학기술 진흥의 장기종합정책 수립을 위한 조사연구(최형섭)’와 ‘장기 에너지 수급계획을 위한 조사연구(한상준)’는 각 분야 전문가를 적절히 활용한 국가 정책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싱크탱크 역할
화학·전기·전자·기계 등 각 분야 기술 개발에 기여

이 같은 산업 실태조사는 산업계와 연구소 간의 접촉과 대화의 계기가 돼 KIST의 연구 범위와 분야를 결정하는 중요 연구 활동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견기업에 실질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68년 폴리에스터 원사 제조회사인 삼덕물산은 20만 달러를 들여 설치한 장치에 문제가 생겨 설비 공급회사 측에 수리를 요청했으나 25만 달러의 수리비가 들고 6개월 후에나 고쳐준다는 회신을 받고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KIST는 방직기기연구실, 기계장치연구실 연구원과 전자 분야 연구요원을 투입해 고장 원인을 조사해 정상 작동케 하는 동시에 제품 회수율을 95% 이상 향상시켜 회사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KIST 수탁연구제도는 빠르게 정착돼 설립 직후 연평균 70여 건에 불과하던 수탁 건수가 10년 사이 3배나 증가했을 정도로 성장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정부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사연구를 진행해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KIST가 과학기술 분야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종합제철소 건설에 참여한 것이다. 정부는 1967년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을 최우선 육성산업으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1969년 장관 직속으로 ‘종합제철 건설 추진 전담반’을 설치하면서 외국의 모든 ‘종합제철 건설계획서’ 검토를 KIST에 요청했다. KIST 연구팀은 조강능력 기준 연 103만 톤 규모의 생산설비와 공장 배치, 원료 대책 및 생산시설의 상세 사양 등을 작성했는데, 이 계획서는 일본 정부와 세계은행 조사단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았고 오늘날 포스코(POSCO)가 세계적인 철강업체로 성장하는 기초로 작용했다.

KIST는 기계공업 육성에도 기여했다. 1969년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을 앞두고 공업화 계획 부문 연구를 KIST에 의뢰했다. KIST 연구팀은 당시 국가 산업 발전의 중심축이 도로, 항만, 통신, 경공업에 치중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중공업 분야가 부가가치가 높고 사회간접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하며 선진국 진입을 위해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내용의 ‘한국기계공업 육성방향 조사연구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더불어 정부가 수출 유망품목을 선정해 국가 공업화에 지대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품목으로 집중 육성할 것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0년 종합중기계공장, 특수강공장, 주물선공장, 대형조선소 건설을 4대 핵심 전략사업으로 중점 육성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이들 사업은 1973년 6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으로 확대 개편돼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추진됐다.

1960~70년대 KIST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에 대해 KIST 홍보담당 김남균 씨는 “당시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선진국의 기술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목표가 매우 분명했고,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 가능한 꿈이라 생각하고 모든 연구원이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KIST의 모토는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였을 정도인데 그러한 노력 덕분에 당시 우수한 성과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부침 딛고 1990~2000년대 도약
창조적 원천기술과 대형 융·복합 기술 개발의 토대 마련

정부 산업화 정책 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하던 KIST는 1980년대 부침을 겪었다. 1980년대 들어 우리나라는 과거 10여 년간 지속된 재정 확대에 우려가 제기되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변화가 생기면서 경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기 후퇴 등 각종 문제들과 중화학공업 집중 투자로 불균형이 야기되면서 정부 차원의 투자 조정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기술 개발 능력이 집중된 출연연구소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1980년 11월 정부는 16개 과학기술 관련 연구소를 과학기술처로 이관해 9개 연구기관으로 통폐합했다. KIST는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되면서 198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새롭게 출범했는데, 두 기관은 설립 목적과 기능이 크게 달라 각각 연구의 자율성에 제한을 받았다. 또한 예산 확보와 운영 형태가 전혀 다른 두 조직이 일방적으로 학사업무 중심으로 운영됨으로써 독자적인 연구와 인력 확보, 장기 대형 연구과제 수행이 어려워졌다. 통합 운영 8년간 여러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1989년 6월 KIST는 KAIST에서 분리 독립돼 설립 초기 본연의 역할로 되돌아갔다.

KIST 측은 당시를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평가한다. 김남균 씨는 “정부의 요청으로 기관을 통합하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교수들과 연구자들의 융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발전을 위해 새로이 시도한 정책이 8년 동안 서로의 차이만 인정하고 끝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KIST로 재출범한 이후 가야 할 길을 더욱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출범 초기에는 연구기획 기능 강화를 통해 창조적 원천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기업과 협력체계 구축으로 연구 성과를 보급하는 등 연구 활성화에 주력했다. 그 일환으로 ▶미래 기술 개발의 핵심이 되는 신소재 연구 ▶국제적 기술 우위 확보를 위한 첨단복합기술 개발 ▶산업계 육성을 위한 원천기술 개발 ▶국민 복지 향상을 위한 공공복지 기초기술 개발 등 주요 연구 방향을 설정했다.

이 같은 연구 기능 수행의 일환으로 KIST는 1989년부터 3년간 신소재 창출, 원천기술 개발에 역점을 두고 뛰어들었다. 아울러 국책연구소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1991년 기술 교류의 창구 역할을 담당할 한·소련 과학기술협력센터를 설치해 구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국제 공동연구 협정도 체결했다. 1993년부터 3년간 KIST 특성화 계획을 수립해 중·장기 미래 원천기술 개발 전담 연구기관으로 위상을 세우는 데 치중했다. 구체적 전략으로 1994년부터 첨단 의료과학기술, 정밀소재 공정기술, 차세대 멀티미디어 첨단소자, 휴먼로봇 시스템 등 미래 원천기술 개발에 적극 나섰다. 또한 1996년에는 유럽 현지 첨단 원천기술 확보와 공동연구를 위해 독일 자를란트주 자르브뤼켄시에 ‘KIST 유럽연구소’를 개소해 에너지, 환경, 바이오 분야 연구 수행과 한·유럽연합(EU) 인력 교류 등을 지원하는 등 거점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이후 1997년 말 외환위기로 KIST 또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KIST 강점 사업인 소재, 환경, 복지, 시스템 기술 분야 중점 추진사업 ‘KIST 2000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난관을 타개한다. 2000년대를 맞으며 ‘KIST 비전21 프로그램’을 추진해 창조적 원천기술 개발과 대형 융·복합 기술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 2003년에는 나노재료·소자기술, 인텔리전트HCI, 마이크로 시스템, 생리활성 선도물질, 순환형 환경기술 분야를 5대 중점 연구과제로 설정하고 2010년 세계 10대 연구기관 진입을 목표로 연구 역량을 집중했다.

KIST는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KIST의 황금기는 앞으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김남균 씨는 “정부가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을 빛낸 대표 과학기술 70선을 선정했는데 그중에 국산1호 컴퓨터, 폴리에스터 필름, 고강도 아라미드섬유, 불소화합물 제조공정, 광통신용 광섬유 기술, 도핑콘트롤 기술, 공업용 다이아몬드 등 KIST의 연구 성과 7개가 포함됐다. 단일 연구주체 가운데 가장 많은 성과였다. 지금도 나노 신경망 모사, 양자 컴퓨터 등 포스트 디지털 시대를 선도할 만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어 앞으로 더 훌륭한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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