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활 서비스 정책/전통시장·소상공인 지원] 저소득 자영업자·근로자 금융 지원

A 씨는 경남 통영에서 족발가게를 운영한다. 창업할 때 20%에 달하는 고금리 대출을 받아 금융 부담을 느끼던 그는 인터넷 검색 끝에 정부에서 저금리 대출을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통영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진행했고, 그곳에서 B은행 거제지점을 소개받았다. A 씨는 그곳에서 2900만 원을 5%의 이율로 대출받아, C캐피털에서 받은 2300만 원과 D캐피털에서 받은 600만 원의 기존 대출금을 갚았다.

 


영세 자영업자나 저소득 근로자는 급전이 필요해도 은행대출을 이용하기 쉽지 않다. 설사 은행 문턱을 넘는다 해도 신용도가 낮아 고금리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올해 대표 신용보증제도인 햇살론을 대폭 확대해 저소득 자영업자와 저신용 근로자 등 서민계층에 대한 금융지원을 강화했다. 햇살론은 제도권 금융 이용이 어려운 저신용, 저소득 서민계층에 대한 금융 지원으로 과도한 금리 부담을 낮추고, 서민금융기관 본연의 임무를 회복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5년간 총 10조 원의 보증부 대출을 공급해 서민금융을 활성화한다는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지원 대상은 개인신용 6~10등급이면서 연소득 4000만 원 이하 또는 연소득 3000만 원 이하 자영업자(무등록, 무점포 포함) 및 근로자(일용직, 임시직 포함)이며, 지원 한도는 대상이나 자금 목적에 따라 다르다. 최대 지원금액의 경우 사업 운영자금은 2000만 원, 창업자금은 5000만 원, 긴급생계자금은 1000만 원, 대환자금은 3000만 원이다. 대출금 이율은 상호금융은 7.61%(상한), 저축은행은 9.16%(상한)다.


햇살론은 중앙정부(복권기금)와 지방자치단체, 서민금융회사가 2조 원을 지역신용보증재단 및 재단중앙회에 출연하고, 지역신용보증재단 및 재단중앙회에서 보증해 서민금융회사가 10조 원의 보증부 대출을 공급하는 체계로 운영된다. 농협, 수협, 신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 저축은행 등에서 취급한다. 햇살론 대출로 저신용·저소득자의 제도권 금융 이용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햇살론을 사업자는 3000억 원(2만8702건), 근로자는 1조4000억 원(17만6905건) 이용했다.

문의 : 햇살론 누리집(www.sunshineloan.or.kr).

 

김모(28)씨의 서민금융대출 이용 후기
엄마는 절대 결석을 용납하지 않았다. 망설이던 나는 가위를 꺼내 어깨춤에 닿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그날따라 아이들의 괴롭힘은 잔혹했다. 체육 수업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 한 아이가 체육복을 빼앗았다.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체육복이 왜 필요하냐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뇌가 부풀어 사지가 뒤틀린 후 매일같이 듣던 말이었는데, 유독 속이 상했다. 맥없이 체육복을 빼앗기고도 한마디 말도 못 하는 내가 너무 미웠다. 엄마는 까까머리가 된 딸 앞에선 아무 말씀도 안 했다.


다음 날 엄마는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끼리 대도시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읍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웠던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A역은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엄마는 나를 업고 곧장 대학병원으로 갔고, 그날 이후 나는 펴지지 않는 팔다리를 몇 번이나 수술하며 지옥 같은 재활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7년을 보내자 나는 비로소 혼자 걸을 수 있게 됐다. 볼썽사납게 팔다리를 휘둘러야 했지만 보행의 자유란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 가족 중 누가 업어주지 않아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 자유에 힘입어 대학에 진학했다. 엄마는 “꼭 육지에서 직장을 얻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병원시설도 잘되어 있고, 비장애인과 어울리며 살길 바랐다.


결국 나는 도시에 남았다. 겨우 장애인 공공근로 일자리를 얻었지만 월세 내는 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나 혼자 살기도 빠듯했다. 설상가상으로 수술한 자리가 부풀어 오르며 땅기기 시작했다. 비용이 아까워 물리치료를 받지 않은 탓이었다. “이대로 두면 무릎이나 팔꿈치 같은 부위는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생활비 명세를 따져보니 월세만 해결돼도 병원 갈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생길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납덩어리가 심장을 찍어 누르는 고통을 참다못한 나는 무작정 은행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대출상담 창구에 앉아 급여명세서와 신용카드 이용 명세, 통장 잔액까지 조회를 받으며 나는 자꾸만 작아졌고, “대출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떠밀리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일주일 내내 점심시간을 은행 찾아다니는 데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 건물에 걸려 있던 햇살론 현수막을 봤다. 이름처럼 내게 햇살이 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을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의 목소리를 듣자 그 친절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상담원은 나를 달래려고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건넸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상담원이 말한 서류를 준비해 팩스로 보냈다. 이 몇 장의 종이가 날 도시에 남게 해줄 것인지, 시골로 갈 짐을 싸게 해줄 것인지 알수 없었다.


마침내 햇살론을 시행하고 있는 은행 중 한 곳과 연결이 됐다. 서류를 보내고 기다리기를 반복하자 내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나를 도시에 남게 해줄 돈, 병원에 가게 해주고 재활을 도와줄 돈 1000만 원이 입금됐다. 벼랑 끝에 햇살이 비친 것이다.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송금하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방팔방 숨을 조여오던 느낌을 털어버리기 위해 몇 번이고 숨을 크게 쉬었다. 살 것 같았다. 월세를 내던 돈으로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팔다리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경련도 덜해졌다. 직장에 서 밥 먹듯 저지르던 실수도 잦아들었다. 생활 전반에 안정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거대하고 쌀쌀맞았던 도시가 내 터전이 됐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내게 비친 햇살을 조금씩 갚는다. 누군가 나처럼 도저히 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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