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희망재단/지상강좌] 이기주 말글터 대표

맑고 쌀쌀한 4월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It was a bright cold day in April, and the clocks were striking thirteen).

맑지만 쌀쌀한 날씨, 그 속에서 열세 번을 울려대는 선명한 괘종시계 소리는 다가올 음습한 미래를 예고한다. 이 문장을 필두로 독재자 빅브라더가 지구 최후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조종하고, 끝내는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펼쳐진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시작이다. <1984>는 그 안에 내포된 의미만큼이나 첫 문장으로 유명하다. 이 안에는 등장인물도, 배경도, 대사도 없는데 말이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첫 문장은 중요하다. 이기주 말글터 대표가 2월 18일 청년희망 재단에서 좋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사진=청년희망재단)

“소설에선 시시콜콜하게 첫 문장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주면 맥이 빠진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첫 문장은 뒤에 따라올 모든 문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전체 글의 핵심이다.”

이기주 말글터 대표는 첫 문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글 속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인지 결정했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낼 것인가가 글쓰기의 기술이다. 첫 문장은 독자가 그 글을 읽을지 말지 결정하게 하는 만큼 기술을 잘 구사해야 한다. 처음‘만’은 잘 써야 하는 것이다. 2월 18일 청년희망재단에서 열린 멘토 특강의 주제는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였다.

경제신문 기자 출신으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에 재직한 바 있는 라이팅 컨설턴트인 이 대표는 “처음부터 잘 쓸 수 없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끝없이 ‘반복’과 싸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 생각을 머릿속에만 맴돌게 할 뿐 끄집어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글을 반드시 써야만 하는 순간 ‘시작, 땡!’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이 대표가 추천하는 방법은 누리소통망(SNS)을 활용하는 것. 영화나 책, 공연을 본 뒤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가 아니라 작품이 내포한 의미와 작가의 사상 등을 고민해본 뒤 재미있고 없는 이유에 대해 쓰는 것이다. 휴대전화 메신저에선 한글 초성만으로도 대화가 되는 시대지만 되도록 문장으로 쓰는 게 좋다. 이 대표는 “백문이 불여일작(作)”이라고 했다.

짧은 첫 문장에 사활 걸 것
단검·장검 혼용해야 글에 ‘리듬’ 생겨

(가) 장미란 선수가 용상 1, 2차 시기를 모두 성공한 뒤 3차 시기에서 170kg을 시도했으나 바벨을 들어 올리지 못했고 결국 올림픽 3회 연속 메달 획득은 물거품이 됐으며, 장미란 선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나)장미란 선수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용상 1, 2차를 모두 성공한 뒤 3차 시기에서 170kg을 시도했지만 바벨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올림픽 3회 연속 메달 획득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위의 두 기사에서 어느 쪽이 더 잘 읽힐까. (가)의 결론을 서두로 옮긴 (나)의 첫 문장은 전체를 함축하면서도 읽는 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이 글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문장의 ‘리듬’이다. 첫 문장은 되도록 짧게, 하나의 생각만을 담아 쓰는 게 좋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 문제는 뒤로 이어지는 문장이 모두 짧기만 하면 재미없는 글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단검과 장검을 적절히 혼용해 휘둘러야 읽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는 “‘단검으로 찰나에 핵심을 찌를 것인가, 장검을 활용해 긴 호흡으로 크게 휘두를 것인가’를 문장마다 고민해야 한다. 두 검을 함께 사용할 때 글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곧 글쓴이 각자의 문체(글쓰기 스타일)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글의 변주도 중요하다. ‘집집마다 빨래가 걸려 있다’는 평범한 문장은 단어 하나만 바꾸면 ‘집집마다 그리움이 걸려 있다’는 명문이 된다. ‘강경파가 퇴임하고 후임자로 협상파가 들어섰다’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매가 떠난 자리에 비둘기가 날아들었다’처럼 은유하면 한 편의 시가 된다. 글 전체의 패턴을 바꾸기 어렵다면 평소 써보지 않았던 단어, 첫 문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참신한 글로 다듬을 수 있다.

쉽고 친절하게 써야 좋은 글
글감 가까이서 찾고 지나친 배움 경계해야

강연은 이내 ‘그렇다면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갔다. 이기주 대표는 “좋은 글은 친절한 글”이라며 청와대 연설문 스피치라이터로 일할 당시 경험을 예로 들었다.

“국가유공자 가족들에게 전할 위로문을 작성해야 했다. 보통 ‘산화한 호국 영령께…’ 하는 비슷비슷한 말로 시작하는데 내가 그 가족이라면 와 닿지 않을 것 같더라.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에 힘쓰다 의사(義死)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하루빨리 건강 찾으시고 ○○이 만나러 가실 때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고맙다며 청와대로 전화를 걸어오셨다. 글을 쓰다 보면 어려운 말을 쓰고 싶은 유혹에 흔들리지만, 정말 쉽게 써야 할 순간이 있다.”

여러 가지를 강조하는 글도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글에는 단 하나의 핵심, 요지가 있고 나머지 문장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조연들이어야 한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비출 것인가는 쓰는 이의 몫이다. ‘뺑소니 사건 검거율 90%’라는 보도자료의 한 문장을 보고 누구는 ‘뺑소니 사건 검거율이 드디어 90%를 돌파했다’는 기사를 쓰고, 누구는 ‘경찰의 미제 사건이 9%에 이른다’는 기사를 쓴다. 아파트 광고 카피는 ‘안전을 생각하는 ○○아파트’, ‘실입주금 3000만 원’과 같이 객관적 정보를 내세울 수도 있지만 “여보! 우리 마지막 이사는 여기로 가요”라며 감정에 호소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쓰는 것은 곧 글쓴이의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 관점은 관찰을 통해 생성된다. 이 대표는 ‘가까이 있는 사물이 학문의 원천이 된다’는 뜻의 ‘좌우봉원(左右逢源)’을 강조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강연을 들어야만 대단한 통찰이 생길 것 같은가? 자신만의 철학은 오늘 친구들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에서, 가족과의 대화에서, 길을 지나며 본 광고 문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답은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위해서라면 너무 많이 배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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