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민주화는 더 이상 혁신의 아이콘이 아니다.
 

어느 시대고 혁신하자는 주장이 없었던 때가 있었을까?

진보와 보수라는 두 진영의 싸움도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방법으로 혁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진영 모두 주장만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인식과 준비가 매우 미흡하다.

그들 스스로 뼈를 깎는 혁신을 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전하진

변양호 전 보고펀드 대표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은 생각하는 표준이 다르다. 두 개의 표준 아래서 국민들은 피곤하다.

표준을 하나로 만들 수는 없을까?  경쟁 촉진, 사유재산권 보호, 복지 지출 확대라는 방향에서 두 진영이 협력한다면 나라도 번영하고 국민들도 편안해 하지 않을까? 서로가 동시에 양보해야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두 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을 잘 섞어 미래를 위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업화 세력뿐만 아니라 민주화 세력도 이미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그들의 성공 경험이 이제는 도리어 혁신을 방해하는 형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기득권자의 혁신은 아마도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혁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려야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IMF위기 때 어떠했는가? 거의 국가 부도사태를 맞는 후에야 벤처라는 새로운 산업이 잉태하지 않았던가.

 

함께 침몰하기 보다는 조금씩 양보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출해내야 하지만 쉽지 않다.

혁신은 조용히 우리 앞에 나타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기득권 세력의 만성적 태도를 유지하는 지금 이대로라면

어두운 미래가 불 보듯 뻔하다는 것에 국민 대다수가 동감할 것이다.

서서히 또는 급작스럽게 파국을 맞이하던가 아니면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혁신하여 뛰어 오르던가 이 결정만이 남았다.

 

기업의 경우도 늘 혁신을 외치지만 최고경영자 스스로 먼저 바뀌지 않는 경우,

시대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최고경영자들은 항상 바쁘다.

그들은 각종 세미나, 조찬모임 등에 나가 부지런히 공부하며 혁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조직 내에 설파하는 데 열을 올린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과거로부터 터득한 성공에 대한 신념이 화석같이 굳어져

스스로는 혁신하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 조직의 혁신은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최고경영자 스스로가 혁신하지 않는 조직이 변할 리 없다.

게시판, 메신저, SNS 등, 다양한 소통매체가 존재하지만,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 라고 말하며

여전히 비서가 대신 전화다이얼을 돌리는 수동적인 모습을 고수하는 행태에서 혁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이런 식의 말로만 하는 혁신을 추진하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도 비슷하다.

정부나 정치권 모두 산업화와 민주화 성공세력들이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혁신은 자신들의 성공신화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야 말로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혁신'이라 생각하고,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만이 국민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그 어느 세력도 더 이상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


♧ 대한민국 교향곡이 울려퍼져야 ♧

 
21세기는 한 마디로 인류가 고등동물화가 되어가는 단계다.

조직이 지극히 단순하고 신경망도 매우 어설픈 하등동물과 같았던 인류가 고등동물처럼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말이다.

촘촘하게 연결되어가는 네트워크가 마치 고등동물의 신경망을 닮아가고,

심지어는 사물까지도 이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아주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해지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발달된 요즘, 길을 못 찾아 몇 번씩 차를 세워 물어보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 주위를 뱅뱅 돌며 헤매는 운전자가 있을까?

교통정체도 수많은 자동차가 마치 한 몸처럼 지능적으로 분산처리 된다. 옛날 같았으면 사고 난 줄도 모르고

지체된 길에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고등동물, 다시 말해 인류가 사람처럼 변해가고 있다.

지구 반대쪽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세상 전체가 반응하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치 발가락 사이에 박힌 가시 때문에 온 신경이 그곳에 쏠리는 것과 같다.

하등동물이었다면 가시가 박혔는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이런 신경망 덕분에 인간이 가진 창조력은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한계를 모르게 진화해 나가고 있다.

 
요즘 번역이나 통역서비스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내 음성을 인식하여 다른 언어로 적확하게 통번역을 해주는 기술에 놀란 적은 없는가.

내 손안에 있는 작은 기계의 성능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의 처리능력을 상상해 보았었는가.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이는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번역서비스의 경우, 어설펐던 초기의 수준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지면서,

그들이 겪었던 불편사항이나 개선요구들을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고쳐나가면서

양질의 번역서비스로 업그레이드 되어가고 있다.
 

이는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보통사람들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라고 부른다.

내가 한 행위가 인터넷망을 통해 모이고 분석되어 새로운 발전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집단지성의 힘은 현재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삼성을 바짝 추격해오고 있는

스타트업 4년차, 중국의 샤오미라는 휴대폰 생산업체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동안의 휴대폰이 하드웨어를 제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샤오미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인터넷 이 세 가지를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 것이다.

멋진 연주를 위해 악기를 선택하는 예술가와 악기를 잘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기술자의 차이라고 할까.

삼성은 기술자이고 샤오미는 예술가라고 표현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사실 필자는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이정도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로서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시작한 우리 아니던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중 하나에서

예술가를 꿈꾸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앞서간 나라를 따라가야 했다. 아주 처절하게 말이다.
 

필자는 1985년 일본에 산업연수생으로 1년을 머물렀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구멍가게에도 자동문이 달려있었고 카메라며 각종 전자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세계최대 전자제품거리인 도쿄의 아키하바라를 거닐며,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가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예술? 턱도 없는 소리였다. 오로지 저런 것을 좀 더 잘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뜯어보고 베끼기를 반복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애국이었고 그것이 생존방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나라가 되었다.

누가 전쟁 폐허가 된 이 나라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해냈던 것이다.

 
이런 기술경쟁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90%에서 95%로 가는 것보다 98%에서 99%로 가는 것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기술에만 의존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뒤따라오는 국가들의 경쟁력도 비슷하거나 이미 앞서 나가고 있다.

뒷심이 달린다. 모든 산업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야 한다.

핀란드는 국회에 미래위원회를 두고 정부가 최소한 15년 내지 20년 후의 국가미래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이에 대한 의견제시나 공론화과정을 정파를 떠나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민이 공감하는 20년 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청사진이 있는가?

도대체 20년 뒤의 우리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단임의 5년짜리 정부라 20년 후를 고민할 겨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사고의 틀을 깨고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재구성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경제다.

 
바로 우리가 만들었던 훌륭한 악기들을 가지고 장엄한 대한민국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훌륭한 악기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자동차, 선박 등 그 이외에서

그 동안 선배세대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이런 훌륭한 악기를 가지고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의 교향곡을 준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수많은 악기들을 만들어 놓았다.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ICT, 전자제품, 한류, 온라인게임, 생산기술, 전력인프라, 인재 등등..

이처럼 작은 땅덩어리에서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는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아닌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집단지성을 창조해야 하고,

선박이 아닌 크루즈산업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 그 보다 더 한 창조적인 산업을 잉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창조 아닌가?
 

창조경제는 바로 이런 기술경쟁력의 세상을 뛰어넘어 예술가의 경지로 넘어가자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산업이 융합하고,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경계선에 창조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정부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창의성을 경제의 핵심가치로 두고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을 통해 산업과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과 문화가 융합해 새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새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악기연주에 국한해서는 안 되고

대한민국의 미래 로드맵이라는 보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미래비전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데 발휘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창조경제란 독주를 해 온 기술경쟁력 시대에서 훌륭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협연의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악기는 기술로 만들지만 음악은 창의력으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기술로 만들지만 플랫폼은 창의력으로 만든다.
 

기술자라면 지정된 재료를 사용하지만 예술가에게는 모든 것이 오브제가 된다.

음을 잘 배열하면 음악이 되고, 선을 창의적으로 배열하면 그림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창의적으로 재배열하면 새로운 생태계가 된다. 우

리가 가진 것들을 재배열 하는 것만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의 세상이다.
 

더 이상 좋은 악기, 훌륭한 악기만 고집하는 기술경쟁력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오브제로 인식하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교향곡을 만들고 협연할 수 있어야 한다.


♧ 창조를 위한 색안경을 껴라 ♧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까지 그냥 그것이라고 정의된 것들이 다시 보이지 않는가.

 
폐허가 된 공장이 훌륭한 갤러리가 된다. 철거를 기다리던 판자촌도 시각을 달리해 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정 문화가 살아있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갤러리가 된다.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농촌마을이 저소득과 중노동을 해결하면 명품 농촌마을로 변신한다.
 

법으로 막기만 했던 카튜닝 사업이 규제를 풀어주니 수천가지의 새로운 자동차 생산자로 변신한다.

잘 수도 없고, 컵라면조차도 먹을 수 없었던 산에 규제를 조금 풀어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이 골짜기 깊은 곳에 들어서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힐링의 장소가 된다.

재개발 단지였던 창신동의 3천여 개의 공장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4시간 만에 상품을 생산하는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공장생태계가 된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 우마차 구입예산을 편성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전(現代戰)은 정보전, 사이버전으로 급속히 전환되어 가고 있는데

아직도 적진에 깃발을 꼽아야 할 보병만이 육군참모총장이 되어서는 미래를 준비한다고 볼 수 없다.

무인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세상에 과연 미래전(未來戰)에 대비한

전력획득에 예산이 제대로 배분되고 있는지도 세심히 살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동일한 기계를 다뤄야 할 엔지니어를 공급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대학이

최고의 지식을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제대로 작동할지도 살펴야 한다.
 

번역앱, 통역앱 등이 날로 지능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영어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어리석은 짓도 중단해야 한다.
 

거꾸로 보고, 새롭게 보고, 다시 보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협력하고, 땀을 흘리는 것만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다.

창조경제는 함께 연주할 음악을 만드는 것이요, 함께 연주하는 것이요 그래서 함께 행복해 하는 것이다.

여기에 너와 내가 다를 수 없고 서로 시기하고 다툴 일이 없는 것이다.
 

필요하면 양보하고 때가 되면 소리 내어 전체가 만들어내는 교향곡의 멋진 소리를 위해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행복해 하면 그만인 것이다.
 

빨간색의 안경을 끼면 당연히 모든 사물이 빨갛게 보인다.

우리 마음의 문을 어떻게 열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틀로 아무리 이 현실을 조명해 봐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그래서 창조경제를 주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눈을 확 떠야 한다. 색안경을 껴봐야 한다.

그래서 거꾸로도 보고 옆으로도 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려있는 오브제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변신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경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려낼 수 있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교향곡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대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그 청사진은 아마도 매년 수정해야 할 지 모른다.

급변하는 시대에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청사진은 많은 시행착오를 줄이는 안내자가 될 수 있다.

 
국가뿐만 아니라 이제 산업 간에도 독주가 아닌 협연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야 한다.

단순한 협업차원이 아닌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하여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역할이 창조경제를 마치 여러 사업 중에 하나로 보고 접근하기 보다는

대한민국 교향곡의 작곡자와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더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작곡자와 지휘자 역할을 하기에는 집행할 사업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마치 작곡자나 지휘자가 연주자까지 겸한 꼴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당연하고

갑작스럽게 기술자가 예술가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넓게 이해하자.

이런 생각의 확산을 통해 조금씩 제자리를 잡아나가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기에 이런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해 내리라 믿는다.

 
창조경제는 기술경쟁력에서 예술가로의 변신인 만큼

매우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 우리 모두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득권층의 엄청난 저항을 이겨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모두가 창조경제를 이해하고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의 국민운동,

다시 말해 대 합창을 할 의지와 용기와 열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도 이런 점을 공유하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 때문이다.

모쪼록 장엄한 대한민국 교향곡을 우리 모두 함께 연주할 수 있기를 학수고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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