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이 인생의 내리막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마음의 근력이라면 성취감은 자신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좋은 스펙으로 무장하면 동력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값비싼 스포츠카도 기름이 없으면 한발짝도 못 움직이는 것처럼 내면의 성취동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국회의원 전하진

부모의 강요나 주변의 도움으로 최고의 졸업장과 수상경력 등 화려한 스펙을 억지로 만들 수 는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성취동기까지 부모가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자극을 줄 수는 있어도 결코 그것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떤 아이가 드러머가 되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 부모나 주변의 반응은 어떠할까?

아마도 많은 부모는 깜짝놀라 아이를 나무랄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드러머냐?'
 
'암튼 다 좋은 데 대학 입학 후에 해라' 든가, '미친놈 죽을래?' 라며 극단적으로 혼을 내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 '그래 그럼 한 번 해 봐라'고 하며 학원을 다니게 하던가 아니면 아예 드럼을 사주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모들 중에 자기 아이가 얼마나 음악에 반응하며 몰입하고 행복해 하는 지 등등 세심한 관찰을 통해 아이의 관심사가 드럼인지를 파악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적어도 뭐가 되는 것, 어느 학교에 가는 것 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아이가 무엇을 통해 행복해 하는지 어디에 몰입하고 있는 지에 관심을 갖는 부모는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의미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초 중 고교를 줄 곳 1등을 놓치지 않는 B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나 학교에서는 기대가 아주 컷다.

그 학교에서 유일하게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만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B는 자동차만 보면 애인을 만난듯 흥분했고 카 디자인에 너무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선언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부모님은 머리를 싸메고 앓아 눕고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서울대 의대에 꼭 가야한다며 설득을 했을 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고 싶다면 공대에 가라'고 받아 준 부모님이나 학교도 없지는 않겠지만
과연 공대를 선택할 수 있게 도와줄 용기있는 선생님이나 부모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결국 B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권유에 자신의 뜻을 접고 서울대 의대를 진학한다.

워낙 성품도 좋고 차분히 공부를 잘 하는 친구니까
 
줄곳 좋은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가 되었다.

공부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여 의사가 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고 10년 넘는 공부를 잘 마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가 된 이후 진료를 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늘 의무감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밖에 나와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보면 가슴이 뛰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을 느끼며 답답함을 느낀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

 
물론 이 스토리는 가설이다. 너무 극단적인 비유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공부를 하고 나서 그 일이 정말 무의미하고 재미없다고 깨닫게 된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많은 부모님이나 젊은이들은 그래도 의대를 가야한다고 주장할 지 모른다.

그렇게 남들 보기에 좋은 자리에서 힘들고 지쳐하며 별로 보람도 재미도 못느끼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알리가 없다.


자신의 꿈을 키워야 할 학생들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기는 커녕 사회적 압력을 견뎌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결국 자살율 1위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면서도 전혀 개선을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동을 해도 공부해라, 노래를 불러도 공부해라, 봉사를 해도 공부해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성적이 이게 뭐냐?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늘 이런 비난의 홍수 속에 과연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영어를 즐기거나 수학을 즐기거나 공부를 즐겨하는 아이들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지겨운 아이들은 다 열등생이 되어야 하고 문제아가 되어야 한다면 정말이지 이 나라가 국민의 행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아주 저급한 국가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열등감을 가져야만 하는 지 
 또 그것을 부추기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지 이해가 가는가. 
 대체 뭘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는 가 말이다.
 
 
엘리먼트 (Element)
 
 
타고난 재능이 열정을 만나는 지점을 '엘리먼트'라고 정의한 사람은 캔 로빈슨 교수다.
 
그는 사람이 뭔가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몰입하는 감정 상태를 '엘리먼트' 라고 정의했다.
 

사람은 이런 엘리먼트 상태가 되면 인생의 본질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살아있는 의미를 깨닫고,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엘리먼트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자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지위도 경제력도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오로지 내면의 엘리먼트를 경험하는 것만이 진정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요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사는 길은 이런 엘리먼트 다시 말해 성취감 또는 뭔가에 몰입해서 얻어지는 희열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지는 모르지만 그런 감정을 자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사회는 이런 엘리먼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결과라도 상관없다는 듯 성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듯 하다.


교육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자기 만의 행복 잣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한 줄로 세워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이런 엘리먼트를 경험하게 되면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행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러한 노력이 결국 자신있는 삶을 만들어 준다.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먼트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엘리먼트는 꾸준히 노력하는 가운데 느껴지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한다.


세계적인 프로골퍼 최경주선수가 처음 골프를 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고 골프가 뭔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휘두는 골프채에 맞아 날라가는 공의 짜릿함을 잊을 수 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 그 이후 오랜시간 그런 짜릿함을 맛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세계적인 골퍼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감독 이야기다. 그는 군에 입대하여 사격훈련을 받는 도중에 단 한발도 표적에 맞추질 못해 심한 얼차려를 받고 힘들어 하다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총을 바꿔달라고 요구한 후에 백발백중 60발을 다 맞추는 짜릿함을 맛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충이 문제였지만 자신의 사격솜씨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사단 사격선수로 발탁되어 꾸준히 그 느낌을 되찾으려 노력한 결과 인생의 진로가 바뀌어 국가대표 감독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많은 경우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니 성취감을 느끼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엘리먼트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다보니 되더라

꾸준하니 늘더라

미치도록 좋아하니 절정이더라

이런 삶이 행복하더라


아마 이 느낌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하라하니 하긴 한다.

억지로 하니 힘만 든다

어쩔 수 없으니 버티고 산다.

그런 삶이 공허하고 허무하더라.


이 글에 공감하게 되지 않을 까 싶다.


남들이 아무리 우러러 보는, 부러워하는 지위에 있더라도 내면의 엘리먼트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결코 자신있는 삶을 산다고 보기 어렵다.

그저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 학습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엘리먼트를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학생들은 불행을 강요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 만의 엘리먼트를 찾게 해 주어야 한다.


어떤 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에 축구를 하고, 산에 오르며, 또 땀을 흘려가며 자전거를 탄다. 누구는 뭔가를 만드는 데 시간을 빼앗기고 누구는 노래를 부르며, 누구는 요리를 하고 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어떤 이는 남을 돕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기도 한다.

이런 것이 다 자신의 엘리먼트를 가꾸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라 느껴지지 않는가.


나의 경우는 학창시절 공부를 통해 엘리먼트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흥미도 없었고 그러니 결과도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기타연주나 공연기획 등을 하면서 이런 순간을 경험한 적은 많다.


단적으로 기타연습으로 밤을 새운 적은 있어도 공부를 하며 밤을 새워본 적은 없었다.


거의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의 엘리먼트는 '항상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관심은 무엇이고, 내 시간을 어디에 가장 많이 투자했으며 또 무엇을 할 때 가장 집중하고 즐거워하고 의미있고 보람있게 보냈는지를 되돌아 보면서 알게 된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미 묘비명을 만들어 놓고 언제 죽더라도 난 이렇게 살다 가려고 한다.
 
 
 "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작은 날개짓으로
 
 변화되는 세상을 즐겼던
 
 로멘티시스트 전하진 잠들다"
 
 
어떤가? 나는 지금 죽어도 이렇게 내 삶을 즐기다 갔을 것이고 훗날 언제 죽을 지 몰라고 그 때까지 늘 변화를 모색하며 작은 날개짓을 멈추지 않으며 살다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개짓이 나에게 기쁨과 성취감과 엘리먼트를 제공하며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꿈이 뭐냐?' 하고 물으면 대통령부터 변호사, 교사, 보좌관 등 다양한 직업을 이야기한다.


아주 구체적인 일을 말하는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는 진정 자신이 무엇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깝다.


자신의 엘리먼트를 발견하고 이를 추구하면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니 그에 맞는 직업이 주어지는 게 진정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두 사람의 훌륭한 선수가 똑같이 금메달을 땃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A는 너무 좋아하여 열심히 하다보니 금메달을 받게 되었고. B는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부모님을 위해 노력 해 우승을 했다면 결과는 둘 다 우승이지만 내면의 만족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강요로 우승을 한 후, 한 동안 슬럼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선수들을
가끔 목격한다. 오랜 방황 끝이 자신에게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로 스스로 받아들일 때
훨씬 자유스럽게 그것을 즐기는 경우를 본적이 있다.


이같이 엘리먼트는 자신의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행복의 기준이 된다.

적어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러한 기준에 부합되지 않은 것은 흥미도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 과감히 물리칠 수 있게 도와준다.


경제적으로 또한 남들보기에 좋다는 이유로 엘리먼트를 경험할 수 없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삶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자신의 엘리먼트를 추구하는 가운데 고통과 어려움 같은 것은 다 이겨낼 수 있는 매력있는 일이 된다.


필자의 경우 사업에 실패하고 난 후에도 책을 출간하거나, 창업을 하거나  음악을 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하는 나를 발견하며 그것이 나의 엘리먼트요 즐거움이요, 행복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지속되면서 나는 그 누가 뭐라하든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고 또 자신있는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사실 인생을 논한다는 것이 죽기 직전에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자신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찬 을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5년은 푸른초원에서 건강하게 달리는 푸른양처럼

  좋은기운과 건강한 생명력이 가득한 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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