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명성이용원 박용각 원장

"살아오며 괄시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회에서 이발하는 사람을 알아주지 않았어요. 젊었을 때 '결혼하기도 어려운 직업'이라고 무시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내가 택한 이 길에 믿음을 더하니 알아주는 분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죠."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탄1동 골목에 위치한 명성이용원. 7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박용각 원장의 50년 이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창원, 봉화, 강진 등 전국에서 박 원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도 수원시 매탄1동에 위치한 명성이용원


옛 모습과 방식 그대로를 간직하며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걸어온 박용각 원장. 이발소에 대한 추억이 사라져가는 요즘, 그가 말하는 긍지와 자부심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 이발사는 내 천직, 이용사 면허 취득 후 서울직업전문학교 최고 경영자 과정 졸업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 15살의 나이에 동네 작은 이발소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잡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렇게 배운 이발 경력이 어느덧 50년이 됐습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의 박용각 원장은 1964년, 수원에 '산둘레미'이라는 이용원을 시작으로 남문과 인계동을 옮겨 다니며 10년 동안 이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박 원장은 인건비 부담과 이발소 운영만으로 생계가 힘들었던 탓에 이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에서 3년 정도 근무했고, 포장마차 운영, 연탄 배달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험난한 일도 많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이발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주야장천으로 공부하며 1981년 이용사 면허 취득, 1997년 서울직업전문학교 최고 경영자 과정을 졸업했다. 박용각 원장은 "이발사로서 전문성은 필수입니다. 더 열심히 일하며 공부했고 그 결과, 다른 분들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과거 박 원장의 선행이 담긴 기사


◇ 35년 동안 이어온 봉사활동, "누구나 할 수 없는 내 인생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와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서둔동 장애 학교 봉사를 시작으로 수원 교도소 재소자 교정교화 봉사, 1993년 불우이웃 돕기 장학금 지급 등 오늘날까지 박 원장의 따뜻한 선행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과로로 쉬고 있지만, 20년 동안 재소자들의 자격증 취득을 위한 기술 교육 봉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한 번의 이발을 위해 3400번의 가위질을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발이 끝나는 거죠." 박 원장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나부터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매탄동 방범 부대장과 수원시 민족통일 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기능인으로서 인정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대통령 공동 표창을 비롯해 내무부 장관 표창, 법무부 장관 표창, 수원시장 표창 등 다수의 표창을 받았다.
 

지금까지 일하며 느낀 애로사항에 대해 묻자, 박용각 원장은

"이발사들은 점심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정해진 운영 시간이 없다 보니 몸 관리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발사 가운데 위암을 겪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박 원장은 오전 8시에 이용원을 열고 오후 7시에 문을 닫는 운영 시간을 정했다. 12시부터 1시간의 점심시간을 통해 규칙적인 식사와 운영의 편의성을 도모했다.
 

박용각 원장 뒤로 수많은 표창장이 보인다.


◇ 이발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 진단,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만족을 줄 수 있어야...


"손님이 들어올 때부터 머리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가르마를 우측으로 타는지, 좌측으로 타는지 보고 머리에 흠집이 있는지 파악한다고 한다. 정확한 진단 없이 이발하면 오차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눌린 머리에는 볼륨을 넣고, 부한 머리에는 숯을 쳐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심한 관찰로 고객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박 원장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냐는 질문에,

"처음 이발을 하러 오신 분인데 커트를 하고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더군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이발을 해봤지만 이렇게 마음에 든 적이 처음이라고 하면서요." 당시 1만 원이었던 이발 요금이 아닌 4만 원을 내며 박용각 원장에게 감사함을 표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자주 찾아오는 손님을 보며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큰 행복함을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 이발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아직도 존재, "이발사만큼 권위 있는 직업은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이발사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제 말을 따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은 이발사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박용각 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발사에 대한 떳떳함과 기능인으로서 자부심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깎사(이발사를 낮게 지칭하는 단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이 보유한 기술로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해온 결과 지금은 주변으로부터 시샘 아닌 시샘을 받는다고 한다.
 

50년 이발 장인 박용각 원장


이용사회 수원지부 고문을 맡고 있는 박용각 원장은 향후 이발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미용을 배우는 젊은이들처럼 전문적으로 이발을 배우고 공부해 이 분야에 대한 권위가 높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또한, "미용사들과 기술 교류를 통해 다 같은 이발사가 아닌 전문 지식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이발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밝을 명'에 '별 성'자를 쓴 이름답게 별처럼 빛나기를 기다린 50년 외길이 어느덧 그의 꽃길이 되었다. 박용각 원장은 "힘닿는 데까지 이발과 봉사활동을 할 예정이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늘 뒤에서 지켜봐 주고 물심양면 도와준 아내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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